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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항일영웅 한의사 독립운동가 신현표 선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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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항일영웅 한의사 독립운동가 신현표 선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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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표 선생

 

1930년 3월 11일 대성, 동흥, 은진 중학교 학우회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학생들의 분노가 커졌다. 나는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에 다시 모여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번 성토대회가 있기 전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격문을 만들어 돌리기로 계획했다. 일본의 탄압과 우리가 얼마나 무분별한 학대에 노출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전단지를 확인한 학생들이 대거 모여들게 되었고 성대한 성토대회를 열 수 있었다. 

3.1만세운동의 기세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과 항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뜻을 함께하는 학생들이 은진중학교로 모여들었다. 은진중학교는 당시 영국 조계지 앞에 있었기에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경찰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이기에 우리는 마음 놓고 담아두었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일본에 분노한 학생들과 일반인, 농민들이 대거 은진중학교에 모여 성토를 하게 되었고 나도 이들과 함께 은진중학교에서 항일투쟁을 위한 성토에 들어갔다. 일본의 야만적 만행을 규탄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에 대한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독립군들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성토대회는 오전 10시부터 시작됐다. 시작하자마자 일본 경찰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열 명 남짓한 기마경찰과 순사가 정복을 입고 철조망 밖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호루라기를 불며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성토를 벌이고 있을 때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동참하면서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제3차 간공사건이라 불렀다.

나는 학생들과 은진중학교에서 일본경찰과 대치했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동지들이 함께였다. 일본 경찰이 압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우리가 아니었다. 나는 간부들과 철조망 앞으로 달려가 우리들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처음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변론을 펼쳤지만, 곧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의 거만한 태도에 우리는 모두 분노를 느꼈고 순식간에 수십의 학생들이 순사들을 덮쳐 때리고 짓밟았다.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만행처럼 옷과 모자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손과 발이 어느덧 주저 없이 나아갔다. 독립군들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학생들과 일본 경찰의 몸싸움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일본 경찰들이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나는 도주하는 과정에서 일본 기마 경찰이 휘두르는 군도에 맞아 옆구리에 커다란 자상을 입게 되었다. 자상을 입은 나를 일본 경찰은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1달 넘게 병원 치료를 받고 나서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치료가 대충 마무리되자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갔다. 

 

미결수로 수감된 나의 죄수 수감번호는 1679호였다. 나는 공산주의자와는 무관한 일반인으로 참여했지만, 무력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30년 4월 23일 감옥이라는 곳이 이토록 열악하고, 힘든 환경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간 내가 누렸던 생활이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한 것이었는지, 힘든 상황에 떨어져 보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칼에 베인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들과 벌였던 혈투는 이제 잊을 수 없게 됐다. 현장에서 학생 한 명은 일본 경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한 명의 저항이 끊어지게 되며 우리의 저항도 끝이 났다. 

나까지 포함해 69명의 인원이 체포되며 심문을 받게 됐다. 심문을 받는 사이에도 사건과 관련된 이들이 여럿 잡혀 들어왔다. 나와 함께 잡힌 일행을 비롯한 69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으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답답한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를 담당한 검사는 삼포웅장(森浦熊藏, 모리우라 쿠마조우)으로 1908년 대구지방법원의 검사로 한국에 부임한 이후 구한말 시기 의병을 심문하고, 3·1운동 당시에는 경성지방법원의 검사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심문한 공안 검사였다. 그만큼 일본에 저항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엄격하게 판결을 내리는 강성한 인물이었다. 

 이제 내 앞길은 어떻게 되려는지, 막막한 암흑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문득, 작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지금 이 암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1930년 11월 28일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저녁.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이 됐다. 제3차 간공사건 재판에서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난 것이다. 일반인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이토록 공기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작은 창틀로 보던, 작게 조각된 하늘이 넓게 드리워진 아래 땅을 밟고 서 있으니, 자유에서 오는 행복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져 몸을 떨어야만 했는데, 밖의 햇살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다행히 금은화(金銀花) 달인 물을 몰래 들여올 수 있어서, 상처는 덧나지 않게 치료할 수 있었다. 베인 상처는 아물기도 힘들지만, 거기에 청결 상태도 좋지 못한 곳에 있어서 다른 염증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컸다. 

 이날 재판에는 나를 포함한 49명이 넘겨졌다. 그중 20명은 불기소 처분을 받을 수 있었고,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형무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형무소 방향은 죽어도 보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왜 말을 하는지, 그곳에서 직접 생활해보니 알 것 같았다. 

그나마 형무소에서 겨울을 맞이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겨울에는 동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홑이불과도 같은 거적만으로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배고픔까지 더해지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932년 9월 5일 고향 북청(北靑)으로 돌아온 지 벌써 2년 가까이 지났다. 석방되고 바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더는 가족의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집에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집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은 오래전 소식이 끊긴 작은 아버지만으로 족하다며, 더는 일본의 간섭받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느낀 바가 있었다. 사람은 본인이 설 시기와 자리를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앞장서 나가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신념이 확고하고, 그러한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게 채워지는 게 아니었다. 


양방과 한의사 자격 2가지 모두 취득한 의사

 사람을 이끌 수 있는 통솔력과 설득력을 겸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체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까지 참여하려 한다면, 군사적인 훈련을 받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동지들이 있어야 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사람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나는 한의학으로 부족한 부분을 양의학으로 채우기 위해 양의사 시험 준비를 했다. 통화현 임강현으로 이주한 후에는 양의사 시험에만 몰두했고, 양방과 한방 의사 자격 2가지를 모두 취득한 의사가 되었다. 

“의술이 아닌 인술을 펼친다.” 

양의사 만주 의사 허가증을 취득하며 항상 좌우명처럼 여겼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환자들 치료에 몰두하면서, 뒤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현장에서 몸을 움직여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그러셨듯 금전적인 도움으로 조금은 편안하게 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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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상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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