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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독립투쟁일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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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독립투쟁일지 中

독립군 3대 대첩, 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을 찾아내다
실패 직전의 대전자령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의사의 기방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립군 군의관으로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한의사가 있다. 바로 신홍균 선생이다. 하지만 신홍균이라는 이름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수시로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흘, 신굴, 신포’ 등 그의 수많은 가명들은 아직도 기록들 속에 남아 그의 업적을 증명하고 있다.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으로 평가되는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일대기를 3부작으로 나눠 조명해본다.





만주사변 이후에도 신홍균 선생은 김중건과 함께 원종교와 대진단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지속해나갔다. 그러던 1933년 3월 초, 한국독립군의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김중건에게 연합 제의가 들어온다. 당시 한국독립군은 쌍성보 전투 이후 동만주 소련 국경지대에서 중국 항일의용군인 길림구국군과 연합해 1933년 2월 경박호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고 동경성을 점령한 상태였다. 이후 영안현과 이도하자 지역 등지에서 일본군, 만주군과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김중건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비축했던 물자와 제1진 정예병 50여명을 파견했다. 여기에 신홍균도 속해 있었다. 그러나 신홍균은 이때가 김중건과의 마지막 순간이 될 것임을 결코 알지 못했다. 

대진단의 제1진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조선공산군 이광의 부대가 군수물자를 빼앗기 위해 김중건 부대가 있던 어복촌을 습격했기 때문이다. 김중건과 간부들이 모두 처형당했고 어복촌 주민들은 강제로 해산됐다. 소식을 들은 한국독립군이 구출을 위해 급히 군대를 보냈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신홍균의 가슴 속에 평생의 한으로 자리잡게 된다. 김중건을 옆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 것이다.


신홍균은 1933년 3월 김중건의 마지막 지시에 따라 부하들을 이끌고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에 합류한다. 이로 인해 한국독립군은 그 규모나 군사력이 크게 향상됐다. 이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잡지 ‘광복’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1933년 4월 사도하자 지역으로 되돌아온 한국독립군은 사병들을 징병하는 한편으로 단기 군사훈련반을 열었다. 당시 동만주 일대에 산재해 있던 신포(申砲) 이하 5백여명의 원종교 신도들은 스승인 김소래(김중건)의 유언에 따라 집단으로 한국독립군에 투신했다. 이들 외에도 한국독립군의 활동 소식을 들은 이들이 다투어 모여들면서 독립군의 위세가 크게 확장됐다.” 


-<광복> 제2권 제1기(1942.1.20.) 一靑(조경한), 「9·18 후 동북지역 한국독립군의 살적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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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균은 한국독립군의 일원으로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중국 연길 왕청현 동북의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라자구에 주둔 중인 일본군이 연길현 방면으로 철수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다.

일본군은 1600여명 규모의 간도파견군으로 지휘관은 이케다 신이치 대좌였다. 한·중연합군은 매복해 일본군을 공격할 수 있는 지점으로 대전자령을 선정하고 부대를 배치했는데, 대전자령은 일본군이 왕청이라는 지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었다.

실제 대전자령에 가보니 기다란 협곡으로 마치 ‘乙’자 모양이 연상되는 굽은 길이었다. 주변에 가파른 절벽과 나무가 많은 산림지역 특성상 적을 공격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한국독립군은 1933년 6월 28~29일경 일본군의 통과 예상지점인 대전자령 서쪽 계곡 양편에 매복했다. 

그런데 일본군의 출발 예정일인 6월 28일 아침부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폭우 때문인지 일본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꼼짝없이 한·중연합군은 매복 장소에서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준비한 식량이 다 떨어져 가는데도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자 한·중연합군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청천과 조경한 등 간부들이 사기를 북돋우려 참호를 돌며 격려에 나섰으나,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던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신홍균이 숲 속에 자생하는 검은 버섯들을 뜯어와 말했다.

“이것 좀 잡수시오. 가을장마 끝에 숲 속에 돋는 검정 버섯인데 중국인들이 요리로 많이 애용하고 요기치풍(療飢治風)도 하지요. 이걸 빗물에 씻어서 소금에 범벅했으니 잠시 요기는 되실 겁니다.”

군의관이면서 약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한의사의 강점을 활용한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지청천과 조경한은 각 부대에 신속히 명령해 굶주림에 허덕이는 독립군들에게 버섯을 먹였다. 당시 이 일이 매우 인상에 남았던 조경한은 이를 자세히 글로 남기기도 했는데, 작은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단서를 찾아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신홍균 선생의 종손 잠실자생한방병원 신민식 병원장은 훗날 조경한이 작성한 독립운동 회고록에서 이러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大甸子大捷(대전자대첩)

據說汪淸大甸子 왕청현 대전자 깊은 골짜기에

飯塚狼群來徜徉 반총(일본군 부대명)의 이리떼(일본군) 지난다기에

酉年六月東京城 계유년(1933년) 6월 동경성에서 정병을 이끌고

預備往攻選銳剛 불원천리 달려갔네

峻嶺險林幾百里 높은 고개, 험한 숲 넘고 헤쳐 수 백리

征人勞苦斷肝腸 단장의 그 고초를 어찌 다 말을 하리요.

(중략)

赤鳥黃兎近三匝 해와 달 뜨고 지기 세 차례이건만

苦待天狼奚到遲 기다리는 이리떼는 아직도 보이지 않네

餱糧罄竭飢侵肚 바닥난 군량은 굶주림을 더하고,

䨟沛連綿冷逼肌 장맛비 차가움 뼈 속에 스며든다.

黑蓸採取和鹽食 검정버섯 따다가 소금 절여 먹어보니

非獨治風且療饑 요기도 되려니와 치풍도 된다누나

可愛奇方何處出 어여쁘다. 이 기방 누구에서 나왔느냐.

姓申名矻是軍醫 그는 바로 군의관 신굴(申矻, 신홍균의 가명)이다.

(하략)

- <군사> 창간호, 1980, 조경한, 「대전자대첩-항일무력투쟁의 한 단면사」


이윽고 6월 30일 아침 6시경, 일본군이 드디어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대전자령 전투의 서막이 열린 것이었다.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한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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