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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독립투쟁일지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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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독립투쟁일지 上

독립군 3대 대첩, 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을 찾아내다
만주로 홀연히 떠난 젊은 한의사,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립군 군의관으로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한의사가 있다. 바로 신홍균 선생이다. 하지만 신홍균이라는 이름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수시로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흘, 신굴, 신포’ 등 그의 수많은 가명들은 아직도 기록들 속에 남아 그의 업적을 증명하고 있다.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으로 평가되는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일대기를 3부작으로 나눠 조명해본다.



신홍균 선생은 음력 1881년 8월 20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동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의업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로 한의사로서 성장했다. 당시 일제는 한의학을 민족 정신의 일부로 보고 민족말살정책을 통해 없애고자 했지만, 이 계보는 끊기지 않고 오늘날 자생한방병원 설립자인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독립 정신뿐만 아니라 한의학 역시 그가 후세에 전하고자 한 유산이라 볼 수 있다.

1911년, 신홍균은 30세의 나이에 갑작스레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넜다. 그가 도착한 곳은 중국 봉천성 장백현 17도구 왕가동 삼포였다. 도구는 오늘날 ‘면, 리’에 해당한다. 그가 어떤 이유로 만주로 향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월남유서에 따르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4000여평의 토지를 종손 신현석에게 전부 위탁하고 홀연히 만주로 떠나 그곳에서 한의사로서 의술을 펼치며 살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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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16년 여름 어느 날, 김중건(원종교 창시자, 대진단을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을 펼친 독립운동가, 함남 영흥 출신)이 장백현 17도구 왕가동으로 자신의 부하 6~7명을 이끌고 신홍균을 찾아왔다. 1914년 봄에 북간도로 망명한 김중건은 독립군 ‘대진단’을 조직하기 전 민족종교인 원종교를 만들어 한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김중건과의 만남은 한의사 신홍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민족종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김중건의 큰 뜻에 감명받은 신홍균은 남은 삶을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1920년 5월 김중건은 200여명의 청년과 함께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했다. 당시는 일제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보복으로 1920년 10월부터 3~4개월 동안 북간도지역 63개 한인 마을의 민간인 2200여 명을 살해하고 2500여호를 방화한 경신참변을 자행하던 시기였다. 

이때 원종교 역시 타격을 입었다. 원종 총사 집무실이 불타고 김중건도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대진단 본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장백현 16도구에 위치해 있던 장백현 지단(지부)만은 온전해 흥업단, 광복단, 태극단 등 당시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이 어려운 시기에 원종교를 재건한 인물들이 바로 신홍균, 김준, 김전 등이다. 이들은 일본군을 탈출한 김중건과 함께 1921년 원종 교도들을 이끌고 우여곡절 끝에 지방 법회를 조직하고 원종 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김중건은 대한국민단의 간도 지방 지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지단장으로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주로 했는데 이 행적을 알아챈 일본군의 급습을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김중건을 포함 동지 10여 명이 다시 검거됐고 3년간 중국 재류금지 명령을 받아 고향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때 김중건의 빈자리를 신홍균이 채웠다. 그는 단장이 사라진 대진단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독립운동가들 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그의 지위는 대정원장이었다. 대정원은 독립적인 기관으로 원종교의 유지 방침과 포교방법에 대해 종무회를 감독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25년 3년 만에 국외로 추방됐던 김중건이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후 행한 첫 번째 일은 남성 위주의 원종교를 여성과 함께하는 새 조직으로 재편성하는 일이었다. 여성종우회 등을 조직해 ‘새바람’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순회강연과 연극 활동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원종교와 대진단 세력을 키워나갔다.

1925년 6월, 중국과 일제는 중국 내 한인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일제에 인계하는 ‘삼시협정’을 체결했다. 중국 당국으로부터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한인 전체가 탄압을 받았고 이로 인해 북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단체들은 존립 자체가 위기에 놓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남북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단체들의 견제도 더욱 심해졌다. 특히 1926년 1월 용정에서 조직된 동만청년동맹은 원종 학생들에게 접근해 모스크바 유학을 시켜준다며 공산주의로 포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해 5월 결성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도 한인학교 내의 교원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등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결국 1927년경 원종교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공산주의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에 김중건은 본격적으로 반공주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일제 경찰에 의해 원종 총본사가 압수 수색을 당했고 김중건을 비롯한 신도 6명이 검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 해 5월 김중건은 총영사관 재판소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으나 검사가 불복해 공소하는 바람에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됐고 1927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재확인 받고서야 방면됐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자행된 수많은 고문은 그의 신체를 철저히 망가뜨려 놓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원종교와 대진단은 한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지역 내 한인 사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이들은 당시 토착 도적세력들로부터 지역 마을 사람들을 지켜냈다. 당시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이들의 업적을 기록한 자료들이 발견됐을 만큼 신홍균이 받았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

그러던 중 1931년 9월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급기야 1932년 3월 만주국과 만주군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이 중국 민중들과 함께 본격적인 한·중연합 작전을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는 후에 펼쳐질 독립군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대전자령 전투와 신홍균 선생이 독립군 군의관으로서 펼친 활약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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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상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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