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158)

徐榮輔의 腠理無衛論
“表陽이 부족하여 추위를 견디어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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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榮輔(1759∼1816)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서 명문가 출신으로 유명하다. 그의 집안 인물로 서문유(徐文裕, 1651∼1707), 서호수(徐浩修, 1736∼1799), 서유구(徐有榘, 1764∼1845) 등이 유명하다.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장원한 뒤 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奎章閣直閣, 湖南慰諭使, 弘文館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술로 『竹石館遺集』이 있다.
『竹石館遺集』의 제5책에서 소(疏)에서 ‘병조 판서의 사직을 청하고 겸하여 사함을 사양하는 소〔乞解兵曹判書兼辭使銜疏〕’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이 글은 1813년(순조13) 1월 4일 올린 상소로서 병조판서와 使銜의 사직을 청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正使의 임무에서 체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承政院日記』 純祖 13年 1月 4日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아래에 그 내용 가운데 서영보선생의 의학관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발췌한다.
“신의 천한 질병은 앞의 상소에서 대략 말씀드렸으니 추하고 더러운 몰골을 감히 재차 보고하지는 못하지만 대개 그 원인은 脾土가 손상되었기 때문이고, 그 증상은 혈액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큰 근본이 이미 무너짐에 백방으로 공격을 받아 주리(腠理)가 약해졌기 때문에 추위가 제일 겁이 나서 갖옷을 껴입고 솜옷을 입어도 오히려 벌벌 떨며 신음하기를 면치 못했습니다. 17일 동안 분주히 날을 보내던 중 공교롭게도 엄동설한을 만났는데, 한기가 밖에서 이르고 완담(頑痰) 고질이 된 담증(痰症))이 안에서 기승을 부리더니 천식이 일어나면 밤새도록 기침을 하고 설사가 나면 온종일 계속 발작하였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 못해 진원(眞元)이 갑자기 줄어들어서 납월(臘月) 이전과 비교하면 또한 몇 단계나 나빠졌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설령 마음 편히 조리하더라도 끝내 병이 나을 리는 없을 것인데, 오히려 어찌 중임을 담당하여 격무를 처리하는 것을 바랄 수 있었겠습니까.(臣之賤疾。槩陳於前䟽。醜穢之狀。雖不敢疊煩。而盖其原則土敗也。其症則血脫也。大本旣虧。百道交攻。腠理無衛。㥘寒最甚。重裘裝緜而猶未免乎波吒。奔走旬有七日。巧値隆冬嚴沍。寒氣外薄。頑痰內肆。哮喘輒至於徹宵。泄痢交作於鎭日。减睡阻食。眞元驟削。其視臘月以前。又不知落下幾層。縱使安意調治。亦應卒無幸理。尙何望其擔夯重任。酬接劇務也哉。)” (이상 ⓒ 한국고전번역원 | 전백찬 (역) | 2017의 번역을 따와 일부 수정함)
위의 글은 徐榮輔 先生이 자신의 질병을 이유로 순조에게 사직을 요청하는 상소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질병을 묘사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며 논리정연함을 알 수 있다. 위에서 徐榮輔가 묘사하고 있는 질병의 모습을 본다면 脾氣不足으로 인한 中氣下陷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계절적으로 추운 겨울을 당하여 오한, 전율 등의 증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이 때 50대 중반이었고 3년 후에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단순히 꾀병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면이 있다.
徐榮輔가 자신의 질병을 묘사한 문장에서 몇가지 키워드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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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其原則土敗也, 其症則血脫也: 脾胃의 陽氣가 不足하여 下血의 증상이 출현함.
○ 腠理無衛: 陽氣인 衛氣가 체표로 공급되지 못하여 腠理의 작용인 溫分肉, 充皮膚, 肥腠理, 司開闔이 안 됨.
○ 㥘寒最甚 重裘裝緜而猶未免乎波吒: 體表의 虛로 인하여 惡寒과 戰慄이 심함.
○ 隆冬嚴沍 寒氣外薄 頑痰內肆 哮喘輒至於徹宵: 感冒 등으로 痰嗽, 痰喘이 일어남.
○ 泄痢交作於鎭日: 寒泄이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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