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⑦

명의 이석간(李碩幹)과 향촌(鄕村) 의국(醫局)
안상우 박사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삼의일험방』 과 『사의경험방』 의 대표 저자
의서 읽고 병자 치료하면서 의학과 학문 전념
인근 주민 치료함으로써 仁術濟世의 도 구현

지난 10월 영주문화원에서 개최한 영주의국(榮州醫局)과 제민루(濟民樓) 역사조명 학술대회에서 ‘명의 이석간의 경험의학과 식치방’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주의 제민루는 단순히 풍
광이 좋은 명승지에 자리잡아 흔하게 볼 수 있는 정자나 누각이 아니다. 조선 태종 때인 1418년 이곳 제민루에 의원이 설치되어 600년을 이어온 가장 오래된 의약계(醫藥契)와 의국(醫局) 전통을 자랑한다. 이 자리에는 필자와 함께 김태환 영주향토사연구소장의 ‘영주(榮州) 의원(醫院)과 제민루의 역사와 전통’, 경인교대 김호 교수의 ‘조선시대 지방 의국의 운영-경북 영주 제민루를 중심으로’와 같은 발표가 이어졌다. 필자가 평소 우리 의학 전통 가운데 하나로 관심을 기울여왔던 지역의학 혹은 지방의학의 면모가 드러나게 되는 발표장인지라 무척 뜻 깊은 자리일 뿐만 아니라 『이석간경험방』과 제민루 사적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어 집중 조명된다는 점에서 가슴 뿌듯한 감회가 어려 있었다.

이석간은 우리에게 조선시대 대표적인 경험방서 가운데 하나인 『삼의일험방(三意一驗方)』과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의 대표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간 이석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으며, 필
자가 십여 년 전 산청한의학박물관 유물도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처음 발굴하여 소개하면서, 이석간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여 영주지역에 누대로 세거(世居)한 공주 이씨 집안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에 걸친 탐문과 답사 끝에 소수박물관에 기증된 그의 과부(科賦)와 유품을 실사하였고 이 자료들을 근거로 명의 이석간의 실체가 규명된 바 있다.

나아가 한의학연구원에서는 전통의학 국역총서 가운데 하나로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과 아울러 『이석간경험방(李碩幹經驗方)』을 선정하여 우리말로 번역함으로써 조선 중기 『동의보감』 편찬을 전후로 활약했던 명의
들의 임상경험과 함께 지역의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되는 밑거름을 마련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강릉약계(江陵藥契)를 필두로 몇몇 지역의료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지방의학의실상을 운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간 필자가 송준길(宋浚吉)이 일평생 기록한 『동춘당일기(同春堂日記)』
의 의약기록 분석을 통해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회덕(懷德) 의국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이석간은 자가 중임(仲任)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라 하였는데, 『퇴계선생문집』에 ‘이중임(李仲任)의 이름은 석간(碩幹)이고 공주인(公州人)으로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에 거주하고, 호는 초당(草堂)으로 의술에 정통했다’고 적혀있다. 그는 14세 때인 1523년(중종18) 아버지와 함께 영주의 귀원(龜院)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이 의국에는 인근의 안동, 예안, 봉화 등지에서 의학을 강습(講習) 받으러 오는 유생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아들, 손자까지 3대가 모두 여기서 의학을 익혔다고 하니, 퇴계 선생이 손수 베껴 쓴 『활인심방』을 남기고 몸소 도인체조를 익혀 전한 것도 이곳에서 비롯
된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석간은 1534년(중종29) 25세에 진사시(進士試)에서 합격하였고 이후 대과 초시에도 입격하였으나 참봉 벼슬에 제수되었다가 곧 물러난 이후로는 평생을 초야에 묻혀 전래되어 내려온 각종 의서를 읽고 병자를 치료하
면서 의학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문과에 응시하고 중인 잡과(의과·醫科) 출신이 아닌 것으로 보아 선비로서 ‘의유동도(醫儒同道)’의 길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고 나아가 인근 주민들
을 치료함으로써 인술제세(仁術濟世)의 도를 구현하고 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그가 ‘유학자 이석간’보다는 ‘명의 이석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선비이자 의원이라는 의미에서 ‘유의(儒醫) 이석간’으로 불리어지 게 된 까닭이다.

캡처

결국 뜻있는 향촌선비들이 입신양명보다는 유의의 길을 택함으로써 열악했던 지방의료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들은 일신의 출세나 명리를 탐하기보다는 의약을 방편으로 지역사회에서 책임있는 지식인의 도리를 실천함으로써 건강한 향촌사회를 운영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의료현장에서도 유의를 지역사회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시골의사의 롤모델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숱한 전설과 함께 중국에 까지 알려진 천하명의로 명성을 떨쳤던 그의 생애와 활인(活人)의 사적은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혔고 그가 남긴 글과 족적도 매우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젊어서 지은 대약부(「賦大
藥」) 몇 구절을 통해 대의(大醫)의 길을 지향했던 조선 명의의 포부를 느껴보기로 한다.

육기(六氣))가 나쁜 기운을 불러들이지만
약초로 치료하는 좋은 방법이 있네.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살려내고
목숨 끊기려는 순간 숨을 이어주네.
그러나 다만 한 사람에게만 이롭고
온 나라에 의술 베풀기는 어렵다네.
성인(聖人)이 세상 보살피는 방법을 살펴보니
아름답도다! 인술(仁術)이라는
선약(仙藥))이 있도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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